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외화자산을 보유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부유층으로 등장.
자산을 다른 국가에 보관하려는 사람이 많아져 예금 인출 사태 발생.
예금 인출 봉쇄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예금인출 사태는 걷잡을수 없게됨.
현재 년간 5천억 달러 수준인 연금지출은 2015년 6천억 달러로 늘어남.
국채발행이 안되면 지급못해.
일본 국민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세금과 대출금 상환에 쓰게돼 내수 소비는 극적으로 위축되고 이것은 내수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일본경제에 직격탄. 실업자의 대량 양산과 그로인한 소비위축의 악순환에 빠짐.
엔, 주식, 국채의 트리플 폭락이 계속 되어, 국내 경제는 칠흑 같은 어둠에.
국내에서는 기업이 연달아 도산해, 거리는 실업자로 넘쳐 돌아간다.
연금은 실질 제로가 되어, 사회 인프라도 유지할 수 없는 듯한 참상에 휩쓸리게...
후지마키 노보루.
4. 금리상승으로 일본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발생.
(고정금리가 아닌 변동금리로 주택론 대출을 받고 있는 국민들은
현재의 제로금리에서 이자상승은 견딜수 없음.)
6. 최후의 조치로 일본은행(BOJ)이 국채 인수----->하이퍼 인플레이션 발생---->예금의 가치, 국채의 가치가 폭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민재산의 몰수와 동일. 일본 국민들, 특히 서민들은 한마디로 파탄.
일본은 자산을 값싸게 해외 자본에 판매.
외국 기업과 투기자본이 몰려와 일본 경제 접수.
===============================================일본 붕괴 시나리오
번역기 돌렸음.
시뮬레이션 20XX년 일본 「재정 파탄」
투고일: 2011년 1월 27일 작성자: tachibana
Tweet「ZAITEN」2011년 2월호의 특집 「20XX년 일본의 국채 폭락」에 게재된 「시뮬레이션 20XX년 일본 「재정 파탄」」을, 출판사의 허가를 얻어 올립니다. 이것은 원래, 편집부의 요청으로, 동특집의 첫머리에 실리기 위해 익명으로 집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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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상승, 디플레 탈출이 주택융자 파산을 부른다
20XX년 1월10일(금). 오전 6시에 닌교초의 원룸 맨션을 나와, 도보로 마루노우치로 향한다. 출근전에 가까운 스타벅스에 들러, 3800엔의 카페 모카를 마시는 것이 나의 자그마한 사치다. 종이 신문은 없어져 버렸으므로, iPad5를 열어 뉴스를 체크한다.
1면 톱은 변함 없이 신쥬쿠 서쪽 출구로 3만명이 넘는 단카이 세대(1948년을 전후로 태어난) 고령자가 모여, 경찰과 충돌했다. 오사카에서는 공무원의 대규모 파업으로 쓰레기를 회수할 수 없기 때문에, 도우톰보리를 거대한 시궁창 쥐가 돌아다니고 있다. 스포츠 뉴스에서는, 중국의 재벌이 인수한 FC긴자가, 바르셀로나에서 전력외 통고를 받은 메시에 이적 제안을 했던 것이 크게 보도되고 있었다.
3년 정도전, 이렇다할 계기도 없이, 국채 가격이 하락해, 금리가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경제학자중에는, 간신히 긴 디플레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됐다며, 이 현상을 낙관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은 가솔린과 야채로, 국제적인 석유가격의 상승과 냉해가 원인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것은, 곧바로 밝혀졌다. 식료품이나 석유 제품 뿐만이 아니라, 온갖 것의 가격이 일제히 비싸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 사람들은, 비교적 침착했었다. 물가의 상승이 급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 평론가들은 뉴스에서, 일본 경제 부활에 필요한 인플레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설했다.
실제, 이 이변은 환영받고 있었다. 예금금리가 5%로 오르고, 「이자 수입으로 생활이 나아졌다」고 기뻐하는 고령자가 와이드쇼로 소개되었다. 달러당 엔이 120엔까지 하락하면서, 도요타나 소니등의 수출 산업이 일제히 최고이익을 경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택융자 파산이 시작되었다.
초저금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변동금리의 장기 론으로 주택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론 금리는 10%까지 올라, 매월의 변제액은 2배가 되었다. 론을 지불할 수 없는 계약자가 속출하면서, 은행은 저당 물건을 닥치는 대로 경매로 매각했다. 금리의 상승으로 대타격을 입은 부동산 시장에 대량의 경매 물건이 쏟아졌기 때문에,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가격은 급락했다.
정부는 당초, 주택융자 파산을 막기 위한 특별조치를 강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은행의 재무 내용을 보자, 대출금 상환 연기나 경매의 유예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일본의 은행은 대량의 국채를 보유하고 있어, 국채 가격의 하락으로 막대한 잠재손해를 안고 있었다. 게다가 담보로 잡고 있던 부동산 가격까지 폭락해, 지금 몇 개의 은행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실질 채무초과 상황이었다. 불량 채권 문제를 재고할 여유같은 건 없고, 변제가 중단되면 즉석에서 처리하는 것 외에 선택사항은 없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은행의 연쇄도산을 막기 위해, 초당적으로 금융 위기 특별법을 가결시켜, 시가회계를 일시적으로 정지해, 장부가액 회계로 되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경제 파탄을 인정했다고 받아들여져 해외 투자가가 일본의 주식과 엔을 매각해, 닛케이 평균은 6000엔까지 폭락, 엔은 1달러=200엔대를 넘었다. 은행 구제를 위해 정부는 대규모 자본 투입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대부분 은행이 실질적으로 국유화되었다.
동시에, 식료품이나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물가가 급속히 오르기 시작했다. 슈퍼의 가격표는 금새 배가 되어, 사재기 현상으로 매장으로부터 물건이 없어졌다. 일본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이 부유층을 교체시켰다
커피를 다 마시면, 도쿄(東京) 역 앞의 하이얼 빌딩에 있는 회사를 향한다. 금융위기전 마루노우치 빌딩의 애칭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외에도, 삼성 플라자나 【다타】·빌리지등, 도쿄도심의 부동산은 대부분 외국기업에 매수되어버렸다.
나는 30대 중간까지, 대기업 전자회사의 기술자였다. 해외기업과의 가격 경쟁에 말려들어서 보너스는 해마다 줄었지만, 회사에 남아 있으면 정년까지 버틸수는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이, 모든것을 바꿔버렸다.
처음에는, 연금생활의 고령자가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기 시작했다. 히비야 공원에서는 노숙자(homeless)를 위한 식사 공급이 1일 3회 행하여지고 있어서, 1만명 가까이가 공원내에서 생활하고 있다. 동일하게 우에노 공원이나 신주쿠(新宿) 주오코엔(中央公園), 아라카와(荒川)의 하천 부지도 골판지 하우스로 메워졌다.
그 다음에, 공무원의 파업이 빈발하게 되었다. 실업률은 30%에 달하고, 거리에는 부랑자가 넘치고 있었다. 정치인은 공무원 급여를 인상하는 것에 주저하고, 실질급여는 그전의 반액 이하가 되었다. 주간지에는, 사무차관의 아내가 편의점에서 일하거나, 재무관료의 딸이 단란주점에서 학비를 버는등의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그 대혼란을 보고, 선천적으로 겁이 많은 나도, 이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수는 없다는 각오를 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완전히 인연이 없는 부동산 영업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다.
부동산업을 선택한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반년마다 정권과 수상이 바뀐 끝에, 일본이 IMF관리가 된다라는 억측으로 흘러서, 드디어 초당파의 구국내각이 성립했다. 신정권의 우선 과제는 재정의 건전화로, 소비세(부가가치세)는 25%가 되고, 연금의 수급 연령은 70세로 높아졌다. 의료·간병 서비스는 보험료가 대폭 오르고, 자기부담은 50%로, 치과치료가 건강 보험에서 제외되었다.
재정재건의 길이 보이면서, 도쿄(東京)의 중심부에서 부동산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엔화하락과 땅값의 폭락에 의해, 외국인투자가에게는 긴자의 일 등땅이 그전의 5분의 1의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유일한 이점은, 영어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전을 찾으면서 철야로 계약서를 번역하고, 구미는 물론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시아의 투자가에게 도쿄(東京)의 부동산을 영업했다.
내가 계약 영업사원이 된 것은 재벌계의 대부동산회사의 자회사였지만, 지금은 모회사와 함께 중국의 투자 회사에 인수되어, 사원의 반이 중국인, 홍콩인, 싱가폴인, 중국계 미국인이 되었다. 외국인투자가는 그들이 영업하기 때문에, 나는 일본인고객의 담당으로 변했다.
일본경제가 대혼란에 빠졌을 때, 바겐 세일(bargain sale) 헌터로 등장한 것은 해외 투자가 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금융위기 이전에 거액 외화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다수의 일본인투자가가 있었던 것이다.
화상 회의에서 상해의 본사에 영업 보고를 하고나서, 오모테산드(表參道)로 향한다. 최초의 고객은, 30대 전반의 젊은이였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1달러=100엔으로부터 300엔으로 통화가 하락하는 과정에서, 레버리지를 뿌린 거액인 외화 포지션을 만들고, 30억엔이 넘는 이익을 얻었다. 그 자금으로 부동산투자를 시작해서, 지금은 시부야(澁谷)나 아오야마(靑山)에 몇채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 금융위기부터 3년, 일본의 부유층은 거의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렸다.
도쿄(東京)의 밤을 색칠하는 중국어나 한글 문자의 네온 사인
가이엔 앞(外苑前)에서 2만엔의 비즈니스런치(business launch)를 먹고, 아자부주반(麻布十番)의 고객을 방문한다. 50세에 은퇴하고, 말레이시아에서 해외이주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엔화하락과 땅값의 하락을 보고, 외화자산을 엔으로 되돌려서 일본에 돌아온 「해외 유턴(U-turn) 족」이다.
그들 새부유층의 덕택으로, 나는 회사에서 탑5에 들어가는 영업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목표에 도달할 수 없으면 즉각 해고되지만, 영업 성적대로 보수가 지불된다. 내가 이전 근무하던 전기 메이커는 인도의 회사에 인수되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하에, 지금은 일본인사원도 인도인과 같은 급료로 일하고 있다.
오늘은 일찌감치 일을 일단락 짓고, 6시의 특급전철로 남알프스의 집에 돌아간다.
금융위기와 이어지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으로, 나의 본가도 아내의 본가도, 조부모가 연금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정리해고당하고, 거리를 방황해버렸다. 그래서 시골에 3채의 집과 농지를 저렴하게 구입하고, 일족이 함께 살도록 한 것이다. 같은 케이스는 이외에도 많아, 일본은 대가족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도쿄(東京)역 앞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여자거지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들의 가지와 같은 가냘픈 팔을 밀어 헤치고 개찰을 빠져 나가면, 5000엔의 맥주를 사서 아즈사의 그린석에 올라탄다. 평일은 도심의 원룸아파트(one room condominium)에서 단신 부임하고, 주말에는 가족이 기다리는 시골에 되돌아오는 생활을 시작한지 1년이 된다.
찬 맥주를 목에 따라 넣는다. 이 주말은, 실직한 아내의 남동생이, 함께 살 수 없는가라고 상담해 오게 된다. 딸의 진학 문제도 골치가 아프다. 장래에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푸념만 할 수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일족의 전원이 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어나 한글이나 아라비아 문자의 네온 사인이, 신주쿠(新宿)의 밤 하늘을 수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창백한 달을 바라보면서, 어느새 옅은 잠에 떨어지고 있었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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